앞선 세대의 좋은 번역 외면·비난하는 건 '고려葬'
대입 논술 겨냥하다보니 목록 선정도 중구난방
"지금 우리 세계문학전집은 재(再)번역이 붐을 이루고 있습니다. 특히 앞선 번역들의 오역(誤譯)을 바로잡는다며 재번역을 정당화하지요. 하지만 이전에 나온 번역의 오류를 바로잡았다고 주장하는 새 번역을 읽다가 새로운 오류들이 생겨난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이세욱)
주요 출판사들이 세계문학전집을 잇달아 내놓고 있는 상황에서 번역의 문제점을 종합적으로 짚어보는 심포지엄이 열렸다. 한국번역비평학회(회장 전성기 고려대 교수)가 지난 18일 숙명여대에서 개최한 '세계문학전집 번역의 의의와 전망' 심포지엄이다.
▲'개미' '뇌' 등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을 번역한 이세욱씨는 "이미 여러 차례 번역된 작품을 왜 다시 번역했는지 자세하게 밝힌 번역이 나와야 지금의 세계문학 출간 경쟁이 진정한 번역의 향연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어린왕자' '동물농장'은 기존 번역본이 20종이 넘지만 여전히 새로운 번역본이 나오고 있다. 이씨는 또 "앞선 세대의 번역을 중역(重譯)이라고 비난하고 새 번역만 좋게 보는 현상은 '젊은 번역'의 기치 아래 죽지도 않은 늙은이를 내다버리는 '고려장'"이라며 "우리의 옛 번역 가운데 정말 좋은 것은 다시 읽고 기리는 일을 젊은 번역자들과 함께 시작하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목록 선정의 기준이 없다
문학평론가 조영일씨는 최근 세계문학전집의 목록 선정에 이의를 제기했다. 조씨는 "세계문학전집이 대입 논술을 준비하는 청소년을 겨냥하다 보니 이것저것 집어넣어 중구난방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출판사의 전체 출간계획 공개'다. 조씨는 "세계문학전집 목록은 그 시기의 문학관을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에 언어별·나라별로 몇 권을 넣었는지, 특정 작가의 작품 중 무엇을 포함했는지 등을 보면 세계문학을 바라보는 시각을 알 수 있고, 역으로 우리 문학을 평가하는 눈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무분별한 베끼기는 사라졌을까
조재룡 고려대 불문과 교수는 앙드레 말로의 소설 '인간의 조건'을 1959년 두 명의 번역가가 각각 다른 스타일로 번역한 것의 한 구절을 예로 들며, 1990년대까지 세계문학전집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8편의 번역본이 이들 번역본과 거의 달라진 게 없다고 지적했다. 번역본에 따라 1959년 번역본들의 어휘나 맞춤법을 조금씩 바꾸거나 심지어 두 번역본을 교묘히 섞어 놓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이 번역본들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번역본들'이라고 규정하면서 "이 황당무계해 보이는 번역문화의 풍토가 지금은 완전히 바뀌었는지 의문"이라며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세계문학전집 번역본들에 독자들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신뢰를 보낼 수 있으려면 베끼기를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프랑스명작소설번역평가연구단은 내년까지 프랑스 소설 70여편의 국내 번역본에 대한 전량(全量) 분석을 통해 '좋은 번역'을 가리는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연구단의 지영래 고려대 교수는 "카뮈의 '이방인'의 경우 국내에 50여종의 번역본이 나와 있어 독자들은 어느 번역이 좋은지 판단이 어렵기 때문에 기준을 마련해보자는 취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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