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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이란 신화, 번역으로 조립된 정체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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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이란 신화, 번역으로 조립된 정체성
신영환 승인 2025.05.02 08:17 댓글 0
역자가 말하다_『민족사회학』 알렉산드르 두긴 지음 | 신영환 옮김 | 진지 | 440쪽
‘상상의 공동체’, 근대 민족을 설명하는 압축된 구절이다. 정치·역사학자 베네딕트 앤더슨(1936∼2015) 저서이기도 한 이 말은, 민족이 역사적으로 유래했다기보다는 근대라는 시대의 필요에 따라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프랑스 혁명을 통해 서구를 중심으로 확산된 자유와 평등 그리고 시민권의 개념이 내포된 것으로, 근대적 산물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민족 개념은 한국인에게 매우 낯설다. 우리가 민족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는,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또한 ‘단일민족’이라는 개념은, 우리는 ‘하나’라는 내적 동질성과 결속을 강화하며 고래(古來)의 신화에서 유래를 찾는다. 그러기에 상상의 공동체로서 한국의 민족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된 이후에야 만들어졌다는 논리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이처럼 민족이라는 개념과 우리의 인식 사이에 나타나는 괴리는, 먼저 프랑스어 나시옹(nation), 영어 네이션을 ‘민족’(民族)으로 번역한 데서 출발한다. 여기에서 ‘민’은 백성, 즉 피지배층을 아울러 일컫는 말이고, ‘족’에는 혈통적 동질성이 내포돼 있다. 민족이라는 말 어디에도 자유와 평등 그리고 시민적 권리라는 어떠한 근대성도 포함돼 있지 않다. 이는 나시옹이 서구의 고유한 역사적 배경과 경험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과 다른 역사와 문화를 가진 우리에게 나시옹은 생소할 뿐이며, 일대 일로 조응할 수 있는 우리말은 애초에 찾기 어렵다.
처음 알렉산드르 두긴 전 러시아 모스크바국립대 사회학과 교수의 저서 번역을 출판사가 의뢰했을 때, 역자가 느낀 감정은 두 가지였다. 우선 두긴의 저서를 번역하려는 기획에 대한 놀라움과 당혹감이었다. 러시아의 유라시아주의와 지정학을 연구하면서 보았던 두긴의 대담하면서도 감상적인 논리와 주장은 납득하기 쉽지 않았다. 매우 위험해 보이기까지 했다. 서구의 한 러시아 전문가는 그를 네오 파시스트라고 비판하기까지 하니 말이다. 그러나 그의 저서가 국내에 단 한 권도 번역된 적이 없다는 점이 당혹감을 의욕으로 바꿨다.
러시아 정계와 학계에서 두긴과 그의 사상이 미친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러시아는 동아시아의 인접 강대국이지만, 상대적으로 우리는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미국과 중국, 일본에 비중을 둔다. 그러나 러시아에 대한 무지와 간과가 초래한 비극의 역사가 있기에, 오늘의 러시아를 이해하기 위해 현대 러시아의 영향력 있는 사상가인 두긴을 소개할 필요가 크다고 생각했다. 그저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판단과 행동도 두긴과 러시아 지성을 고려하면 헤아릴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이 책은 두긴이 기존 저작에서 보인 정치적 슬로건과 주의 주장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그것은 이 책이 민족사회학의 이론에 천착한 철저한 학술서이기 때문이다. 부제를 ‘이론적 토대’라고 붙인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두긴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주류 서구의 나시옹 개념에 대한 재해석이다. 나시옹은 결코 역사적으로 보편적 현상이 아니다. 대신 인간 사회를 분석할 때 광범위하게 적용할 수 있는 기본 개념인 ‘에트노스’(ethnos)를 중심으로 이론을 구축한다. 여기에는 인간 집단과 공동체를 지칭하는 가족, 혈족, 친족, 부족 등을 시작으로 민족, 나로드(narod), 국민, 시민사회, 탈사회 등 다양한 개념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개념들을 엮어 일관되고 체계적인 민족사회학 이론의 분석틀을 제시한다.
이 책을 번역할 때 가장 큰 난제는 용어였다. 여기에는 인간이 구성하는 여러 집단들을 지칭하는 다양한 용어들이 등장한다. 각 용어가 뜻하는 바와 지칭하는 대상에 대응하는 적절한 우리말을 찾는 것은 번역을 마무리할 때까지도 어려운 고민이었다. 두긴은 문화인류학적 접근을 설명하면서 서로 다른 문화 체계 간의 번역 불가능성을 주장한다. 이 주장처럼 매 구절 모든 단어를 마주할 때마다 번역 불가능성에 부딪혀야 했고, 번역자로서 갈등적 상황을 불만족스러운 타협으로 풀어야 했다.
그나마 나름의 원칙을 세웠는데, 하나는 일관성이었다. 예를 들어, 문장에서 의미상으로 ‘씨족’보다는 ‘혈족’이 혹은 ‘혈족’보다는 ‘친족’이나 ‘친척’, ‘인척’ 등이 더 자연스럽게 읽히는 구절이 있었지만, 하나의 용어에 조응하는 우리말은 하나로만 표기했다. 그리고 에트노스는 ‘민족’으로 나시옹 혹은 네이션은 ‘국민’으로 번역했으며, 이에 흔히 민족주의로 번역하는 내셔널리즘도 ‘국민주의’로 표기했다. 일관된 용어 번역은 복잡한 이론을 이해할 때 독자의 혼돈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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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책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이기에, 처음에는 독자가 일반적 의미로 용어를 이해하지만, 점차 읽어 나가면서 그 책 고유의 세계라는 맥락에서 재해석하며 점차 저자의 의도에 가까워질 것이라 보았다. 그럼에도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 없거나 생소한 조어로 이질감이 큰 경우는, 어쩔 수 없이 원어를 그대로 사용했다. 대표적인 것이 ‘나로드’이다. 이것은 민족이 복잡화하는 다음 단계로 역사성과 정치가 결합된 위계적 사회를 지칭한다. 이런 경우에는 원어 그대로 표기한 이유와 그 뜻을 주석으로 추가했다.
정치적 프로파간다가 배제된 진지한 학술서임에도, 이 책에서 두긴의 사상적 경향은 일관되게 유지된다. 두긴은 서구의 발전론적 역사관과 인류 보편적 가치의 주장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오늘의 서구는 미래에 비서구가 도달하게 될 목적지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사회, 민족, 국가는 각기 다른 역사적 배경과 공간적 환경에 있으며, 서로 다른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무엇이 더 ‘발전’됐다고도, 더 ‘우월’하다고도 말할 수 없다. 인류 모두가 지향해야 할 보편성도 허구에 불과하다.
인간 사회는 역사와 시간의 흐름 위에서 더 광역화하고 복잡해질 수 있지만, 그렇다고 큰 사회가 쪼개지고 단순화하는 것이 퇴행은 아니다. 그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다. 따라서 서구의 관점에서 러시아 사회를 비판하는 것은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지적 헤게모니와 오만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이에 두긴은 서구의 지적 독주에 대한 대안으로 러시아적 지성을 역설했다. 그것이 지정학과 제4의 정치이론이라는 이름으로 신유라시아주의와 러시아의 지역 패권을 주장하는 극우주의의 근거가 됐다.
당혹감에서 의욕으로 시작했던 번역 작업이 한 권의 책으로 마무리된 시점에서, 홀가분함과 안도보다는 불안과 기대가 뒤섞인 감정을 피할 수 없다. 두긴의 저서를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번역해 소개한다는 부담이 크다. 더구나 두긴의 극우 사상이 우리 사회에서는 어떻게 이해될 것인지, 우리의 독자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이 된다. 한편 이 책이 제시하는 민족사회학 이론에 대한 기대는 조심스럽지만 보다 크다.
나시옹의 개념에 우리의 민족을 끼워 맞추려는 무모했던 노력과 그로 인한 지적 괴리는 그냥 지고 갈 불편한 부담으로 남아 있었다. 강단에서 ‘민족’을 이야기할 때마다 과하다 싶을 만큼 시간과 노력을 들였지만, 오히려 더 흔들리는 학생들의 눈동자를 보았고, 그것은 학생들 탓이 아니었다.
이 책은 새로운 시각에서 민족을 이해하는 이론적 틀과 분석의 방법을 제시한다. 어쩌면 민족을 이야기할 때마다 느꼈던 괴리를 두긴의 민족사회학으로 조금은 더 좁힐 수 있지 않을까, 혹은 민족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보다 풍성해지지 않을까 기대한다.
신영환
고려대 평화와 민주주의연구소 위촉연구원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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